제 1 장. 괴사(怪事) (1)
허름한 장포에 한 자루 검, 봉두난발에 긴 수염으로 가면을 쓰지 않았음에도 얼굴을 알 수 없었다.
묵묵히 나아가는 그의 주변으로 연신 피분수가 일었다. 온갖 도깨비 가면을 쓴 채 그를 공격하는 자들의 피다.
절대쾌검(絶大快劍)!
검을 뽑는 걸 보지도 못했는데 달려드는 적들의 피가 천공으로 치솟아 노을인 양 번졌다.
가면이 아니라 정말 이매망량이 아닐까 의심되는 수백만 적들의 공격을 뚫고 그가 내게 와 말했다.
“승리의 날에 너는 들을 것이다. 강호 그 모든 것을 위압하는 칼 부딪는 소리를.”
검명(劍鳴)!
나는 그의 말이 놀랍지 않았다. 당연하다며 온몸이 물결쳤으므로 손을 뻗어 검을 잡았다.
함성이다.
큰바람이 이니 구름이 치솟는구나!
황자흥의 아침은 한결같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코에 땀이 배일 정도로 무술을 익힌 후 담을 한 바퀴 돈다.
풍상에 시린 크고 작은 돌들이 오랜 세월을 말했지만 담은 여전히 성벽처럼 굳건했고 실제 재작년에 미친 소가 들이받았을 때도 끄떡없었다.
딱 한 번 무너진 적이 있는데 근 오 일여 폭풍우가 휘몰아쳐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다.
어렸을 적의 일로 한 사람이 반나절을 일할 양도 되지 않았기에 총관 여(呂) 노(老)가 직접 담을 수리했고 그는 곁에서 까불거리며 장난을 쳤다.
그때 일을 하던 여 노가 씩 웃으며 무엇인가를 손에 집어주었다. 녹이 많이 슬었지만 두 냥은 충분히 나갈 은두(銀豆)였다.
놀랍게도 뒤이어 크기는 작지만 금두 두 개도 나왔다. 그래서 황자흥은 담을 거닐며 이 속에 세상을 뒤흔들고도 남을 보물이 숨어있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늘 했다.
그러나 오늘은 유쾌한 상상을 할 수 없었다. 어디가 아파서는 아니다.
취해서 타는 목을 달래고자 떠먹은 길가의 샘물이 공청석유(空淸石乳)였는지 만년삼왕을 더덕인 줄 알고 먹었는지 오히려 근자에 몸이 너무 좋았다.
작은 물방울들이 흥겹게 혈관을 돌며 탁한 것들을 지우는 듯했다. 온몸 들썩이는 음악을 들었을 때와 같은 짜릿한 전율도 종종 혈도를 타고 놀았다.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 힘도 세어졌다. 꾸준한 수련 덕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일이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몰랐다.
몸은 그랬지만 앞서 말했듯 기분은 마치 악몽에라도 시달리는 듯했다.
‘실제 악몽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지!’
황자흥은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그러나 볼은 통증으로 이것이 꿈이 아님을 전해주었다.
내전과 외전을 가르는 벽돌담은 텃밭을 만드느라 좌우 끝을 쳐내 담으로서의 구실을 잃은 지 오래다. 그는 그곳을 지나며 야채를 땄다.
“상추는 머리를 맑게 하고 피로를 풀어주지. 부추는 피를 맑게 하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추에 부추를 싸 한 입 가득 넣고 우적거리는 그의 표정은 마치 벌레를 씹는 듯했다.
외전은 계단을 두고 아담한 크기의 연무장과 연결된다. 연무장을 사이에 두고 좌우 두 채의 전각이 있다.
무가에서 새가 깃을 펼친 듯, 오색 꿩이 날아가는 듯한 지붕은 바랄 일이 아니다. 내전, 외전 모두 좋은 목재로 단단하게 지어졌기는 했지만 화려함과 거리가 멀다.
연무장의 전각들은 더욱 밋밋하다. 아마 이전에 이곳을 지키던 수하들이나 잡일을 하던 자들이 기거하던 곳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가끔 소제를 했지만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빨리 허문다. 총관 여 노에게는 여정휘라는 아들이 있다. 그는 괜한 일손만 가니 연무장의 전각들을 부셔 목재나 땔감 등으로 팔자고 했다.
여 노는 펄쩍 뛰었다. 내일 일을 누가 알 수 있겠느냐며 저곳에 다시 사람으로 넘칠 수 있다고 했고, 누구 마음대로 부수니 마니 하느냐며 전대 장주들에 대한 불경죄까지 들고 나왔다.
여 노와 여정휘는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싸웠다. 직후 여정휘는 조용히 집을 나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벌써 재작년의 일이다.
집에 하인이라고는 하녀 한 명뿐이니 대문을 여는 일이 다시 여 노의 몫이 되었다. 그래서 황자흥은 작년에 자신이 이제 문을 열 것이라고 했다. 매사 반대만 하는 여 노인데 무슨 생각인지 이 일은 순순히 수락했다.
스무 계단을 내려가 연무장에 발을 디딘 황자흥은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 연무장을 씩씩하게 가로질러 대문으로 향하나 오늘은 무슨 일인지 마지못한 발걸음으로 계속 담을 따라 돌았다.
대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표시 나게 무거웠다. 하지만 대문과 만나는 건 피하지 못할 그의 운명이었다.
대문 앞에 서 빗장을 잡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는 자신의 그런 모습에 화를 내며 이를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힘차게 문을 열었다.
여름의 풍광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의 눈은 초점 없이 겉돌았다.
잘난 체해봐야 돌아올 게 칼밖에 없을 것이므로 무가야말로 겸손함이 미덕이다. 건물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되도록 치장을 삼간다는 것인데 황자흥이 지금 만지고 있는 대문을 지키는 석상(石像)…… 사자석상은 장원의 규모에 비해 너무 컸다.
당장이라도 발을 구르며 도약할 것 같은 수호석상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황자흥은 시선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위로 치켜떴다.
갑자기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있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어젯밤 사라졌던 현판이 다시 붙어있었던 것이다.
비바람에 씻겨 글자의 흔적만 보이고 있지만 서예를 아는 자라면 누가 봐도 탄복할 명필 중의 명필의 쓴 글, 풍운장(風雲莊)! 그가 지금 있는 곳으로 그는 장주다.
풍운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오순도순 모여 사는 이십 여 호의 농가는 장원의 논밭을 일구고 산다. 임 노인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삼 일 전에 그는 족히 넉 자는 됨직한 흑어를 봤다고 했다.
황자흥은 식솔들의 여름보양식 생각이 나 당장 낚시에 나섰다. 하지만 흑어는 꼬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는 아예 작정을 하고 밤낚시까지 했는데 안타깝게도 결과는 같았다. 현판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건 밤낚시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다.
현판이 없어지다니……, 머리가 하얘졌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다시 보았지만 현판은 없었다.
현판을 잃는 것은 문파의 수치 중 수치다. 얼굴 붉힌 채 허둥거리던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린 건 일각여가 지나서다.
조롱이 문제가 아니다. 현판을 가져간다는 건 문파에 도전장을 내는 일이다. 피바람이 불수도 있기에 황급히 여 노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방문에 비친 그의 그림자를 본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 노의 부지런함이야 소문났다. 새벽이 오기에 이른 시간임에도 일을 했다.
불빛 아래 모습이 평상시와 같이 장부 관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판이 없어졌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긴 알았다면 벌써 낚시터로 찾아왔겠지.
‘말해서 뭐해!’
황자흥은 왠지 그에게 변고를 말하기 싫었다. 심려만 끼칠 뿐 그라고 해서 달리 방도가 있으랴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뒷받침이 없다면 당장 쓰러질 허울뿐인 장주지만 어쨌든 장주다. 현판을 잃은 게 뭔 자랑거리라고 난리를 부린다는 말인가. 자신이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자흥은 침착하자는 말을 백 번이고 되뇌며 적의 출현 시 여 노에게 날릴 신호 전부터 챙긴 후 온 신경을 곤두새운 채 새벽을 기다렸다.
다행히 새벽이 오기까지 적의 공격은 없었다. 황자흥은 혹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 모를 적에게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으므로 평상시와 같이 아침 수련을 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대문도 열었는데 고맙게도 사라졌던 현판이 제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아 그는 숨을 크게 삼킨 후 정자세로 쭉 뻗은 길을 바라보며 섰다.
풍운장은 크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길 하나는 넓어 술 취한 대여섯 필의 말이 달리기에도 충분하다. 관도와 만나는 곳까지 근 이십여 리 뻗어있는데 어떤 토호, 향신도 길만큼은 풍운장을 능가하는 곳을 본 적이 없다.
수호석상 사자도 큰 길에 맞추느라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물이 휘감고 돌아 반은 섬이라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 또한 천군만마가 달려도 끄떡없게 단단했다.
“본 장이 이전에 상가였소?”
여러 물건을 실은 수백 대의 마차가 오갔을 길로 보여 언젠가 황자흥은 물었다.
“상가는 무슨! 원래부터 무가였습니다. 길은…… 선대의 위업이지요. 장주께서는 그 위업을 이을 책임이 있습니다.”
선대의 위업……. 여 노가 늘 하던 소리나 했다.
“아무렴! 설마하니 저 길을 개미가 지어주었겠어! 선대의 위업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황자흥은 시원하게 뚫린 길을 보며 두 눈을 번뜩였다. 그러다가 돌연 하늘땅 가를 듯이 칼을 휘둘렀다.
모든 악한 것들에 내리는 통렬한 불벼락, 투왕뇌격(鬪王雷擊)! 가전무공인 투왕십로(鬪王十路)의 한 초식이다.
황자흥은 칼집에 칼을 넣은 후 어깨를 쭉 폈다. 그리고 군례를 취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현판이 제자리에 있기에 천지신명께 드리는 감사의 인사였다. 뒤돌아서 조상들에게도 감사했다.
“살았다, 살았어.”
정말 숨이 막혔었다. 그는 행여 또 달아날세라 현판 있는 곳을 몇 번이고 보며 좌측 담을 따라 내전으로 향했다.
외전을 지나 내전으로 들어설 때 안도의 가슴을 쓸던 그의 표정이 변했다.
낚시가 하도 되지 않아 술을 많이 마시긴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현판 잃어버리는 것까지 착각할 정도로 취했을 것이라고.
현판이 사라진 건 분명한 일이니 손을 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어떤 놈이야?”
황자흥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당장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사자삼괴(獅子三怪)!
풍운장을 지키는 거대한 수호석물 사자 탓인지 풍운장을 둘러싼 산은 사자산, 물은 사자천, 마을도 사자촌이다. 사자산과 사자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중과 도사, 거지가 산다. 사자삼괴는 황자흥이 그들에게 붙여준 별호다.
기괴한 행적으로 이번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도 종종 그의 의심을 샀다. 하지만 그는 곧 그들에 대한 의심도 버렸다. 사는 모습이 기이하기는 하나 사고를 치는 건 아직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누구?’
풍운장은 주목을 받은 적이 없다. 주목 받기를 바란 적도 없다. 총관 여 노는 공공연히 바깥사람들과 만나는 걸 경계까지 했다.
사자산 그늘 아래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으니 누구랑 원한 맺을 일이 없다는 이야기다.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귀신이 장난을 쳤나?”
머리를 긁적이던 황자흥의 표정이 일순간에 변했다. 듣기로 오래산 것들은 그것이 지렁이라고 할지라도 신령스러워 진다고 했다. 특히 흑어는 잉어와 다툴 만치 영물로 취급받는다. 넉 자 크기면 아주 오래 살았다는 뜻.
‘흑어가……?’
등골이 오싹해지며 머리칼이 쭈뼛 섰다. 그는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창문까지 꼭 닫았다.
한참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하녀가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그제야 황자흥은 정신을 차렸다. 얼굴이 빨개졌다.
“명색이 장주라는 자가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진짜 귀신이 나타나도 싸워야할 판인데 고작 헛된 상상에 꽁무니를 뺏으니 수치를 느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벌써 바람이 후덥지근했다.
성도(成都)에서 타강의 물줄기를 따라 동남으로 넉넉잡고 한나절 말을 타고 달리면 자양(資養)이라는 제법 큰 도성이 나온다. 풍운장은 자양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
삼사백여 년 전에 선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풍운장을 세웠다. 다른 이유야 없을 것이다. 풍광이 수려하고 물빛이 너무 맑다. 배를 띄우고 놀면 신선이 부럽지 않은 곳이다.
원래 오늘 그의 계획은 흑어 아니면 닭이라도 솥에 넣어 식솔들과 물놀이를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판 소동으로 진이 빠져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창가에서 머리를 툭툭 때리고 있던 그가 눈썹을 꿈틀했다.
“여 노였나?”
현판을 볼 때마다 여 노는 손을 좀 봐야한다는 말을 종종 했다. 하지만 황자흥은 곧 고개를 갸웃했다.
환한 낮도 있는데 왜 깜깜한 밤에 현판을 손본다는 말인가? 현판은 밤에만 손봐야 한다는 강호의 법도가 있었던가? 흥분해서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손본 흔적도 없었다.
여 노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그러나 황자흥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현판 없어진 게 무슨 자랑이라고! 떠들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는 일이다. 장주인 자신이 소리 소문 없이 해결해야 한다고 다시 다짐했다.
“여 노가 그랬다면 다행한 일이지.”
여 노에게는 기회를 노려 은근슬쩍 물어보기로 했다.
“만약 다른 놈이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황자흥은 인상을 쓰며 칼자루를 잡았다.
“장주.”
하녀가 밥을 먹으라며 불렀다.
“나를 화내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폭풍의 전조지!”
황자흥은 기세 좋게 고함을 지른 후 밥상 앞에 앉았다. 늘 한가한 곳이 풍운장인지라 그의 성격 또한 조급하지 않다. 오히려 느긋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다른 것도 아닌 하필이면 현판 문제라니! 적도들이 들이닥친 것보다 더 마음이 찜찜했다. 정말 큰일이 있을 듯해 밥 먹는 게 모래알을 씹는 듯했다.
검명
지은이 : 장경
펴낸이 : 유철종
펴낸곳 : (주)북큐브네트웍스
전 화 : 02-862-2665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구로3동 191-7 에이스테크노타워 8차 6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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